[순례지 소개]중국 실크로드 주요 순례지 소개

마음여행
2019-03-04
조회수 4368



 1   돈황 막고굴


▶ 돈 황 : 면적 3.2㎢, 인구 113,000명 (2006년),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 mm이다.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 허시저우랑 서쪽 끝, 당허강 유역 사막지대에 위치하며, 란저우와의 거리는 1,137 km, 둔황석굴 25 km 이다.

 돈황 막고굴은  중국최대석굴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돈황시 동남쪽 25 km 떨어진 명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일명 천불동이라 한다. 동서로 길이 1.6 km로서 355년에 낙준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역대로 수차 건조 개축되었다.

16국 시대, 북위, 북주, 수, 당, 5대, 송, 서하, 원에 이르는 10개 왕조의 동굴 사원이 현재 492개, 벽화 4만 5,000 m, 채색 조각상 2,000여 개, 당나라, 송나라 목조건물 5채가 보존되어 있다. 조각상은 진흙바탕에 착색한 것으로 표정과 자태가 모두 다르고, 벽화의 내용은 불상, 보살상, 불교사적, 경변, 신화, 공양인 등과 장식도안이다.

인도 불교 예술을 기초로 한 이들 석굴의 불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한곳을 응시하는 눈, 볼록한 뺨, 두텁고 큰 손 등 모두가 둥그스름한 풍부함과 부드러운 곡선을 지니고 있다, 물방울이 둥근 것처럼, 지구가, 우주가 둥근 것처럼 항상 멈춤 없이 윤회하는 궁극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 같다. 석굴에 조형된 불보살의 얼굴 하나 하나에서 잊고 있던 순수 무구한 미적 감각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 16번 - 3층 누각: 2층 365, 3층 366, 1층 16번-내부 입구 북쪽에 유명한 17굴 장경동이 있다.


▶ 17번 - 일명 장경동으로 1908년 3월 어느날 석굴을 관리하던 왕원록 도사라는 거사가 벽에 구멍이 생겨 두두려 보고 막아놓은 벽을 허물자, 내부에서 1천년전의 두루마리 고서 등 5만 여점의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때 중앙아시아를 탐험하던 영국의 스타인(1907.3월)과 프랑스학자 펠리오(1908.2~5월)가 차례로 방문, 대부분 중요 서적들을 헐값에 반출, 보물들이 흩어졌다. 1910년 청나라 정부는 4분의1도 남지 않은 자료를 북경으로 옮기도록 했으나 왕원록은 다 보내지 않았고, 일본의 오오타미 탐험대(1911~1912), 러시아 세르게이 올덴부르크(1914~15) 등에게 유물을 팔아 넘겼다. 특히, 오오타미 탐험대에 의해 돈황과 중앙아시아 문물이 반출된 후 우리나라 경성에서 일부 전시 되었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펠리오는 북경에서 돈황유물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이 때부터 “돈황학”이 시작되었다. 펠리오가 발견한 서적중에는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 있었고, 현재 파리국립박물관 소장되어 있다. *혜초스님은 귀국길에 돈황에서 머물렀었다.

동굴내에는  고승 홍변상  수하미인상 의 벽화가 있다 : 홍변은 9세기 인물로, 토번에 점령된 돈황지역을  848년 장의조가 수복한 후 하서의 도승통을 맡았다. 그는 돈황의 수수께끼를 낳은 장본인으로 추정되며, 16, 17번 석굴은 그가 조성했고 수행하던 석굴이다. 12세기 서하가 지배했을 당시 서하왕은 몽고의 침입에 대비해 보물을 보존하려고 장경동에 보물을 감추었다는 설도 있다.


▶ 96번 - 북대불전 33m, 9층 전실(내부 7층 누각식 전실) 미륵대불조성 - 중하단 부분 청대 보수 및 채색 *695년 측천무후 때 건립
  * 측천무후[684년(690재위)~705년 집권으로 국호변경] - 미륵신앙의 확신과 불교부흥 *중국역사상 최초로 여황제가 등장 - 사회적 및 도덕적 정당성이 필요했다.
측천무후는 불교경전에 입각하여 여자 황제의 정당성을 찾았다. 이에 대운경소(해석서)를 전국에 반포하고 주와 '현에'를 건립케 하였다. 이후로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되고 대운경소도 각광을 받았고, 이 책은 돈황에서도 발견되었다. 측천무후가 법상종(현장법사의 유식학)을 확대 발전시키자, 미륵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미륵불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이 96굴도 이러한 연유로 개착되었고, 기록에 등장하는 “대운사”가 바로 96굴로 확인되고 있다.




<신강 위그루 자치구> 신강성 - 인구 2,000만명, 면적 166㎢-중국의 6분의 1에 해당

타림분지(타클라마칸사막) 33㎢ (한반도의 1.5배, 남한의 3배가 넘는다.)

몽고,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크스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와 접경한다.

한대에 서역도호부, 당대에 북정과 안서도호부, 송대 서요지, 청대 광서10년(1884년) 신강성으로 지배, 1955년 10월1일 신강위구르자치구 성립, 현재 5개 자치주, 8개구, 2지급시, 17현급시, 62현, 6개 자치현, 약 60개 시현이 대외개방 되었으며, 연평균 강수량 100~500밀리에 달한다.

신강성은 예전부터 서역이라고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펼쳐진 분지와 오아시스 그리고 초원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지역이다. 예부터 유목민과 한족간의 패권다툼이 심했던 곳으로 흉노족, 돌궐족, 위구르족 등이 활동했었지만, 흉노족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돌궐족은 터키로 갔으며, 현재는 위구르족이 널리 퍼져 살고 있다.

행정수도는 우루무치지만 정신적인 고향은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의 카슈가르이다. 중국은 예전에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고자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오늘날에는 풍부한 석유 때문에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위구르족은 독립을 하려고 가끔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인구는 1,876만 정도, 이 중 40%는 한족이며 60%가 위구르족을 포함한 10여개의 소수민족이다.






 2   우루무치

우루무치란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을 지닌 몽고어이다. 천산북로의 요충지로 목장이던 이곳이 오늘날에는 신장성의 성도로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현대화, 개방화 물결은 이 초원의 도시에도 거침없이 몰아치고 있다. 우루무치 자치구의 수도이지만, 인구 110만에 이주정책으로 한족이 대다수 차지하여 주민 중 80%는 한족이다.


▶ 천 지 : 우루무치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로, 서역의 천산산맥에 위치하는 호수이다. 해발 5,445 m인 보거다봉 중턱, 해발 1910 m에 있으며 수심 100 m에 달한다. 면적 3㎢에 달하는 거대한 천연호수로 산봉우리가 감싸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기후변화가 심하지 않아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유람하거나 카자흐(하자크)족의 천마를 타고 산을 돌아 볼 수도 있다.






<투루판>

위그루 말로 “파인 곳”이란 뜻으로, 남북 60km, 동서 120km, 해발보다 낮은 -154m에 위치한 중국에서 가장 낮은 분지로, 이스라엘의 사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지역이다. 그래서 여름이면 보통 40℃가 넘는 더위로 숨쉬기 조차 힘겨우나, 가을과 겨울에는 선선해 기후로 여행하기 좋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서역으로 진출하려는 한나라와 이곳 유목민 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다. 카슈가르와 더불어 위구르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포도가 많이 생산되어 포도 축제도 열린다. 손오공의 무대가 되는 장소이며, 당 현장법사가 머물기도 했고, 고창국의 국왕으로부터 인도 유학에 막대한 비용을 지원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3   교하고성

기원전 1세기경에는 고창고성과 함께 투루판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처음에는 이란계 사람들이 흩어져 살았다. 전한시대에는 차사국으로 불렸는데 한서에 의하면 차사국은 700가구에, 인구6,050명, 병사 865명의 작은 왕국이었다. 차사국은 교통의 요지여서 항상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 하나라와 흉노족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왕이 한나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한 무제가 흉노족을 완전히 몰아내자 이곳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후 중심지가 고창고성으로 옮겨질 때까지 투루판의 중심지였다.


교하고성은 글자 그래도 두 개의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의 벼랑 위에 위치해 있는데, 벼랑은 남북의 길이 1,600M, 동서의 폭이 330M로 마치 군함 같은 모습이다. 아래로는 푸른빛의 강물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주택가, 관청, 절, 감옥 등 모든 시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벽에 줄무늬가 남있는 것은 언덕위에서 파내려 가며 지은 탓에 지층의 표시가 보이는 불가사의한 건축공법이다. 흙벽돌로 쌓은 고창고성과 달리 교하고성의 건축이 세월을 잘 견디어 낸 것은 바로 이런 건축방식 때문이다.






 4   카레즈

우물이라는 뜻으로 천산산맥의 눈이 녹은 물을 사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위에서 수직 우물을 만든 뒤 지하에서 수로를 파고 연결해 오아시스로 물을 끌어들인 시설을 말한다. 이들 우물 수로를 연결하면 만리장성보다 훨씬 더 긴 길이가 된다고 한다. 만리장성, 경항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공정의 하나로 손꼽힌다.






 5   고창고성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던 투루판의 중심지. 지금은 불타오르는 듯한 화염산을 배경으로 폐허만이 남아 있다. 이곳의 벽돌은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버들가 마른 풀을 섞었는데, 왕국 멸망 후 주민들이 벽돌을 깨 비료로 쓰는 바람에 폐허가 되었다한다.


 

 후한 멸망 후 4세기 초 이 지역은 고창고성을 중심으로 흉노족, 티베트족, 돌궐족(터키족)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고창국왕과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었지만, 정세에 따라 현명하게 처신하여 목숨을 보존했으나, 힘을 키워나가며 실크로드의 패권을 잡으려다 그만, 당나라와 충돌하여 멸망 당하였다. 고창국의 멸망을 본 인접국가 서돌궐은 긴장하여 당나라와 일전을 벌이나 657년에 지금의 타슈켄트 지방에서 멸망하고 만다. 이 때의 장수가 바로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었다. 이 후 당나라가 직접 경영하게 되었다. 현장 법사는 천산북로를 택해 인도를 가려다가 불교신자인 고창국의 국민태 왕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에 의해 이 곳에서 설법을 하며 발목을 잡히기도 했으나, 고창국왕이 20년간의 유학자금과 물자를 지원하여 천산남로를 따라 인도에 갔다올 수 있었다. 현장법사가 머물렀다는 절터도 남아있다.


아스타나고분군 : 투루판시 동쪽으로 약 42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스타나고분군은 기원3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고창국의 구족들의 시신을 묻은 묘이다. 이 고분군의 길이는 동서로 약 5km, 남북으로 약 2km 되는데 이곳에서 많은 미이라를 발굴하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미이라 22구는 투루판시 박물관에 7구가 보존되어 있다. 고창고성 근교에 위치한다.






 6   화염산

화염산은 붉은색의 암석인 산인데, 동쪽의 지선으로부터 서쪽의 투루판시까지 그 길이가 약 98km이며 평균고도가 약 500m이다.
위구르인들은 “빨간 산”이라는 뜻인 ‘쿠즈로다고’로 부른다. 강열한 태양으로 인해 풀 한포기 자라지 않고, 억센 힘줄이 불끈 솟아 이루어진 듯한 모습은 마치 불길이 치솟는 듯이 보여 그 이름이 유래가 되었다. 연강수량이 16.6㎖의 건조지대지만, 태고적에는 많은 비로 인해 주름이 잡혀 있어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름 최고기온이 48℃, 지표온도가 60~70℃로 계란을 삶아질 만큼 가장 더운 지역이며, 겨울에는 영하-20℃까지 내려간다. 명청시대의 유명한 작가 오승은의 서유기에서도 화염산의 싸움은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두고 쓴 것이다






 7   베제크리크 천불동

화염산을 지나 북쪽 산기슭을 가면 절벽 중턱을 깍아서 만든 석굴이 있다.
6~14세기 경에 조성된 석굴로 위구르인들이 그린 화려하고 섬세한 벽화와 불상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이슬람교도와 외국 탐험대의 약탈로 크게 훼손돼 불상과 벽화는 거의 사라져 버려 애석하다. 약 83개의 동굴이 있는데 현존하는 동굴은 57개이다. 그중 벽화만 40여개에 달하여 투루판시에서 동굴이 제일 많고 벽화내용도 제일 풍부한 불교석굴사 유적의 하나이다. 이들 사원은 인도와 이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석굴내에는 부처와 보살상을 안치하고 둘레 벽에는 불교를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대부분 9~10세기경의 벽화들이지만 온전한 것은 드물다.

천불동은 기원 6세기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까지 발전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불교를 신봉하던 회골 고창국이 감숙 영창으로 옮긴 후 이곳은 이슬람교의 진입으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었다. 또 근세에는 러시아, 독일, 영국 등 전승국의 도굴을 당해 내부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가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불상이나 벽화만으로도 충분의 세계에서 불교석굴사 유적으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다. 일본 오오따니 탐험대가 사원에서 가져온 벽화 등 많은 자료가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 남아있다.



중국 여행 시 주의 사항

비 자 : 중국여행시 비자가 필요합니다. (신청서류 : 비자신청서, 중국비자용 사진 1장)
   
   중국비자 신청하기          중국비자사진규정

시 차 : 한국보다 1시간 늦습니다. (ex: 한국 오전 10시 = 중국 오전 9시)



 # 실크로드, # 실크로드 여행, # 서유기 배경, # 중국여행, # 불교여행지, # 삼장법사, # 현장스님, # 돈황 미술, # 불교 미술

0 0

마음여행 실크로드여행사

불교성지순례 / 해외문화탐방 / 트레킹

SERVICE

02 · 720 · 9600

AM : 09:00 ~ PM 06:00 (주말·공휴일 휴무)

ACCOUNT

예금주  I  마음여행   /  국민은행  006001-04-297742

예금주  I  실크로드여행사  /  국민은행  023-01-0542-481

ADDRESS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8, 에스엔에스빌딩 901호

 [우편번호 0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