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지붕 티베트’
티베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공기는 매우 맑으며, 눈으로 뒤덮인 높고 넓은 산과 시원한 호수 등의 풍경이 매력적인 곳입니다.
1. 조캉사원 (대소사)
티벳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원으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티벳불교의 총본산으로 송짼감포왕이 647년에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송짼감포가 네팔의 부리쿠티 공주를 맞아들여 그녀를 위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역사적 신빙성을 얻고 있다.
후에 중국에서 맞아온 문성공주가 모셔온 ”조오 석가모니불상(12세 모습)“을 안치하여 그 영험함을 받드는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1300년의 불심이 살아 숨쉬는 이 사원은 팔각형의 거대한 3층 건물인데, 사원의 둘레를 따라 조성된 팔각가는 코라를 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상점을 찾는 쇼핑객들로 분주하다. 정문앞에는 오늘도 세상 모든 것들의 평화와 심지어는 중국인들의 평화를 비는 선량한 티베트인들이 몸을 던져 오체투지를 하고 사원의 옥상에는 그들을 굽어 살피는 금동당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조캉사원앞에는 822년 당과 화평조약을 체결한 회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763년 장안을 침공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토번왕조는 당과 화평조약을 체결하여 3곳에 세운 회맹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석이다.
2. 포탈라 궁
티벳의 왕이였던 달라이 라마가 머물었던 궁전
‘포타’는 범어로 배를, ‘라’는 항구를 뜻하는데,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보타낙가산’의 이름에서 명명되었다는 점에서 역대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컫는 티벳 주민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7세기 초(620년 투뵈왕국) 성립, 티벳을 통일한 33대 송첸감포왕(581~재위 618-649)이 투뵈왕국 당시 ‘체탕’에서 수도를 라싸로 옮기고, 그 산 중턱에 현재 송짼감포왕과 문성공주 네팔의 부리쿠티공주 등의 소상이 모셔진 법왕동을 중심으로 궁전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8세기 후반에 벼락으로 인한 대 화재가 있었고 이후로도 왕국의 분열로 훼손되어 그 당시의 모습을 쉽게 알 수 없다.
현재의 포탈라 궁은 제 5대 달라이라마(1617~1682)인 응아왕 롭쌍 가초에 의해서 ‘마르포 리’라는 “붉은 언덕(고도130m)”위에 위용을 보이고 있다. 1645년 시초하여 1648년 백궁 완공, 1649년 드레풍사원에서 새로운 궁으로 옮겨왔고, 포트라 마르포(붉은 궁전)은 그의 사후 12년 째인 1694년에 그의 섭정 상예가쵸에 의해 완공되어 그의 시신은 이곳에 안장되었다. 정부청사와 사원으로 사용되던 백궁과 홍궁은 총 13층의 높이로 높이 115m, 동서 360m에 이르며 미로같은 통로로 연결된 크고 작은 방만도 1천여개를 넘는데, 역대 달라이라마들의 거주하던 곳과 그들이 묻힌 화려한 무덤의 탑, 정부관청들, 불교경전 목판인쇄소, 정부관리 교육 학교, 화려한 장식이 눈부신 수백개의 회당과 법당들이다. 우주법계를 형상화한 만다라,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보살상과 성인들, 사천왕상, 역사상, 악귀 등 티벳의 만신전 상들이 수 천 개 있다.
3. 드레풍 사원 (철방사)
라싸 서쪽으로 8km 떨어진 대규모 사찰로, 5,200m의 높이를 가진 감포위쩨산에 세워져 있는데, 티벳에서 가장 큰 규모로 하얀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드레풍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볏집더미 모양’이라고 한다. 1416년 티벳의 고승인 겔룩파의 시조 쫑카파의 지시로 잠양초제가 창건, 1530년 2대 달라이라마가 간데포트랑을 지었고, 5대 달라이라마가 증축하여 포탈라궁이 지어질 동안 이곳에서 통치하였다. 한 때는 10,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를 했을 정도지만, 14대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현재는 400여명 정도만 남아 있다. 쇼툰(요구르트축제) 기간에 추는 전통적인 참(Cham, 액막이 가면 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4. 세라사원 (색랍사)
라사의 북쪽으로 3km, 티벳 불교사원으로 티벳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크다. 쫑카파의 제자 사캬예쉐가 1419년에 창건, 한때는 약 5,000여명의 승려가 수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현재는 약 300여 명의 승려가 있을 뿐이다. 세라는 ‘자비로움이 충만한 우박’이란 의미로서, 우박은 볏집더미를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드레풍사원과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드레풍이 정치와 학교의 역할을 동시에 한 반면, 세라는 오직 공부와 연구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사원이다. 세라의 학승들은 명석하고 실력이 있는 승려로 인정받고 있는데, 오후 3:30분부터 사원내 “토론의 정원”이 벌어지는 라마승들의 토론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설립 당시 다섯 개 대학에서 1959년 중국침략이후 세 개로 줄었고, 경내에는 대집회당, 승려들의 교육 장소 등이 있다.
5. 얌드록초 (호수)
티벳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3대 호수 중 한 곳
라싸에서 남하하여 얄룽장뽀강을 건너 캄팔라 고개(4,441m)를 넘으면 푸른 보석같은 호수 얌독초(4339m, 630㎢)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남초와 마팜윰초(마나사로바), 라모라초와 함께 티베트의 ‘4대 성호’로 추앙받는 이 호수는 얄룽왕조 최초의 임금인 네티짼뽀와 그의 부인 용녀 랑무무의 전설을 비롯하여 온갖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어 ‘신이 잠든 호수(분노한 신들의 안식처)’라고도 일컬어진다.
6. 펠코르최데 (백거사)
1414년 원나라를 등에 없고 티베트 불교를 주무르던 사카파에 의해 창건된 이 사원은 후에 카담파, 겔룩파가 중수하면서 지금은 3개의 종파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까닭에 각 종파간의 특색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종파의 관용적인 모습으로 15개 사원 중 켈룩파 9개, 3개 사카파, 3개는 부파Bupa(사카파의 한 갈래)의 사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 십만불탑 (쿰붐스투파)
사원의 바로 옆에 위치한 하늘에 닿을 기세로 우뚝 서 있는 37m 높이의 9층 대탑으로 설역고원에 남아있는 유일한 네팔식 불탑이다. 층마다 빼곡히 들어찬 법당의 수는 77개, 드나드는 문만 108개이며 법당에 불보살과 역대조사들의 소상과 벽화가 남아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만존에 이른다하여 “십만불탑”이라 부른다. 특히 탑의 상층부가 시작되는 4면에 혜안안을 그려 넣은 벽화가 인상적이다.
7. 타쉴훈포 사원
오늘날 중국측에서 추대된 11대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사원으로, 티벳불교의 양대 중심지의 하나이다. 겔룩파의 창시자인 총카파(1357-1419)의 제자 겐덴드루프(1대 달라이라마)가 1447년에 설립했다. 5대 달라이라마에 이르러 자신의 스승이자 이 사원의 원장이 아미타불(완벽한 인식과 지각능력을 갖춘 부처의 신성)의 현신으로 인정하면서 타쉴훈포의 지위가 격상되었고, 이 원장에게 ‘위대한 철학자’라는 뜻의 판첸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오직 달라이라마만이 갖고 있던 세속적 지도자의 역할도 부여하였는데, 이후로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겔룩파 내에서 충돌하는 빌미가 되었다.
8. 사캬사원
사캬에서 흥미로운 점은 건물이 검은색이다. 짙은 회색 바탕에 세로로 흰색과 붉은색의 줄을 치고 문이나 창문 가장자리에는 검정색으로 라인을 만들어 그려 놓았다. 3합은 티벳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3대 보살, 릭숨 곤포Rigsum Gompo(①아발로키테스바라-관세음보살, ②바즈라파니-금강밀적보살, ③만쥬스리-문수보살)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캬파 종단의 권위를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 사캬의 역사적 배경
티벳역사에서 11세기는 불교가 부활하며 활력이 넘친 시기였다. 이때 캬규파종파와 함께 사캬파종파도 사캬사원을 세우며 티벳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사캬사원은 1071년 당시 세력 있는 콩Kong가문(8세기 트리송 테첸왕 일족의 후손)의 일원이었던 콩 최걀 포(Kong Chogyal Pho)가 세웠다. 사캬사원의 원장은 티벳의 다른 사원들이 전 원장의 환생 라마를 사원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과는 달리 세습제였으며 콩가문의 자손들에 한해서만 승계되었다.
사캬사원이 당시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사원의 역할을 인도식 불교대학들을 본따 설립한 사원 내 학교교육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사캬의 원장을 지냈으며 사캬 판디타Sskya Pandita(사캬의 대학자라는 뜻)로 알려진 쿤가 걀첸Kunga Gyaltsen이다. 그는 지각과 논리에 관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써 학문적 탁월함과 영적인 고귀함을 인정받고 만쥬스리(문수보살)의 현신으로 동일시되었다.
1251년 사캬 판디타가 죽은 뒤 그의 조카들 중 한 사람이 사캬원장이 되었고 티벳 전역은 당시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는 사캬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캬파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몽골식의 통치방법으로 후에 티벳 통치체제에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와 후원자라는 성격을 규정한 이러한 미묘한 관계는 나중에 중국이 후원자를 자칭하며 티벳을 지배하는 권리를 주장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몽골의 힘을 배경으로 한 사캬파의 주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몽골 통치자들간의 갈등과 부패 그리고 카규파와의 경쟁으로 사캬파는 1354년 몰락하였다. 이후 카규파가 권력을 장악해 티벳정부는 우지방의 네동Nedong으로 옮겨 갔지만 사캬는 중국의 지배하에 들기 전까지 여전히 자치권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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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지붕 티베트’
티베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공기는 매우 맑으며, 눈으로 뒤덮인 높고 넓은 산과 시원한 호수 등의 풍경이 매력적인 곳입니다.
1. 조캉사원 (대소사)
티벳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원으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티벳불교의 총본산으로 송짼감포왕이 647년에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송짼감포가 네팔의 부리쿠티 공주를 맞아들여 그녀를 위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역사적 신빙성을 얻고 있다.
후에 중국에서 맞아온 문성공주가 모셔온 ”조오 석가모니불상(12세 모습)“을 안치하여 그 영험함을 받드는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1300년의 불심이 살아 숨쉬는 이 사원은 팔각형의 거대한 3층 건물인데, 사원의 둘레를 따라 조성된 팔각가는 코라를 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상점을 찾는 쇼핑객들로 분주하다. 정문앞에는 오늘도 세상 모든 것들의 평화와 심지어는 중국인들의 평화를 비는 선량한 티베트인들이 몸을 던져 오체투지를 하고 사원의 옥상에는 그들을 굽어 살피는 금동당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조캉사원앞에는 822년 당과 화평조약을 체결한 회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763년 장안을 침공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토번왕조는 당과 화평조약을 체결하여 3곳에 세운 회맹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비석이다.
2. 포탈라 궁
티벳의 왕이였던 달라이 라마가 머물었던 궁전
‘포타’는 범어로 배를, ‘라’는 항구를 뜻하는데,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보타낙가산’의 이름에서 명명되었다는 점에서 역대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컫는 티벳 주민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7세기 초(620년 투뵈왕국) 성립, 티벳을 통일한 33대 송첸감포왕(581~재위 618-649)이 투뵈왕국 당시 ‘체탕’에서 수도를 라싸로 옮기고, 그 산 중턱에 현재 송짼감포왕과 문성공주 네팔의 부리쿠티공주 등의 소상이 모셔진 법왕동을 중심으로 궁전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8세기 후반에 벼락으로 인한 대 화재가 있었고 이후로도 왕국의 분열로 훼손되어 그 당시의 모습을 쉽게 알 수 없다.
현재의 포탈라 궁은 제 5대 달라이라마(1617~1682)인 응아왕 롭쌍 가초에 의해서 ‘마르포 리’라는 “붉은 언덕(고도130m)”위에 위용을 보이고 있다. 1645년 시초하여 1648년 백궁 완공, 1649년 드레풍사원에서 새로운 궁으로 옮겨왔고, 포트라 마르포(붉은 궁전)은 그의 사후 12년 째인 1694년에 그의 섭정 상예가쵸에 의해 완공되어 그의 시신은 이곳에 안장되었다. 정부청사와 사원으로 사용되던 백궁과 홍궁은 총 13층의 높이로 높이 115m, 동서 360m에 이르며 미로같은 통로로 연결된 크고 작은 방만도 1천여개를 넘는데, 역대 달라이라마들의 거주하던 곳과 그들이 묻힌 화려한 무덤의 탑, 정부관청들, 불교경전 목판인쇄소, 정부관리 교육 학교, 화려한 장식이 눈부신 수백개의 회당과 법당들이다. 우주법계를 형상화한 만다라,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보살상과 성인들, 사천왕상, 역사상, 악귀 등 티벳의 만신전 상들이 수 천 개 있다.
3. 드레풍 사원 (철방사)
라싸 서쪽으로 8km 떨어진 대규모 사찰로, 5,200m의 높이를 가진 감포위쩨산에 세워져 있는데, 티벳에서 가장 큰 규모로 하얀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드레풍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볏집더미 모양’이라고 한다. 1416년 티벳의 고승인 겔룩파의 시조 쫑카파의 지시로 잠양초제가 창건, 1530년 2대 달라이라마가 간데포트랑을 지었고, 5대 달라이라마가 증축하여 포탈라궁이 지어질 동안 이곳에서 통치하였다. 한 때는 10,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를 했을 정도지만, 14대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현재는 400여명 정도만 남아 있다. 쇼툰(요구르트축제) 기간에 추는 전통적인 참(Cham, 액막이 가면 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4. 세라사원 (색랍사)
라사의 북쪽으로 3km, 티벳 불교사원으로 티벳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크다. 쫑카파의 제자 사캬예쉐가 1419년에 창건, 한때는 약 5,000여명의 승려가 수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현재는 약 300여 명의 승려가 있을 뿐이다. 세라는 ‘자비로움이 충만한 우박’이란 의미로서, 우박은 볏집더미를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드레풍사원과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드레풍이 정치와 학교의 역할을 동시에 한 반면, 세라는 오직 공부와 연구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사원이다. 세라의 학승들은 명석하고 실력이 있는 승려로 인정받고 있는데, 오후 3:30분부터 사원내 “토론의 정원”이 벌어지는 라마승들의 토론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설립 당시 다섯 개 대학에서 1959년 중국침략이후 세 개로 줄었고, 경내에는 대집회당, 승려들의 교육 장소 등이 있다.
5. 얌드록초 (호수)
티벳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3대 호수 중 한 곳
라싸에서 남하하여 얄룽장뽀강을 건너 캄팔라 고개(4,441m)를 넘으면 푸른 보석같은 호수 얌독초(4339m, 630㎢)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남초와 마팜윰초(마나사로바), 라모라초와 함께 티베트의 ‘4대 성호’로 추앙받는 이 호수는 얄룽왕조 최초의 임금인 네티짼뽀와 그의 부인 용녀 랑무무의 전설을 비롯하여 온갖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 있어 ‘신이 잠든 호수(분노한 신들의 안식처)’라고도 일컬어진다.
6. 펠코르최데 (백거사)
1414년 원나라를 등에 없고 티베트 불교를 주무르던 사카파에 의해 창건된 이 사원은 후에 카담파, 겔룩파가 중수하면서 지금은 3개의 종파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까닭에 각 종파간의 특색을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종파의 관용적인 모습으로 15개 사원 중 켈룩파 9개, 3개 사카파, 3개는 부파Bupa(사카파의 한 갈래)의 사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 십만불탑 (쿰붐스투파)
사원의 바로 옆에 위치한 하늘에 닿을 기세로 우뚝 서 있는 37m 높이의 9층 대탑으로 설역고원에 남아있는 유일한 네팔식 불탑이다. 층마다 빼곡히 들어찬 법당의 수는 77개, 드나드는 문만 108개이며 법당에 불보살과 역대조사들의 소상과 벽화가 남아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만존에 이른다하여 “십만불탑”이라 부른다. 특히 탑의 상층부가 시작되는 4면에 혜안안을 그려 넣은 벽화가 인상적이다.
7. 타쉴훈포 사원
오늘날 중국측에서 추대된 11대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사원으로, 티벳불교의 양대 중심지의 하나이다. 겔룩파의 창시자인 총카파(1357-1419)의 제자 겐덴드루프(1대 달라이라마)가 1447년에 설립했다. 5대 달라이라마에 이르러 자신의 스승이자 이 사원의 원장이 아미타불(완벽한 인식과 지각능력을 갖춘 부처의 신성)의 현신으로 인정하면서 타쉴훈포의 지위가 격상되었고, 이 원장에게 ‘위대한 철학자’라는 뜻의 판첸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오직 달라이라마만이 갖고 있던 세속적 지도자의 역할도 부여하였는데, 이후로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겔룩파 내에서 충돌하는 빌미가 되었다.
8. 사캬사원
사캬에서 흥미로운 점은 건물이 검은색이다. 짙은 회색 바탕에 세로로 흰색과 붉은색의 줄을 치고 문이나 창문 가장자리에는 검정색으로 라인을 만들어 그려 놓았다. 3합은 티벳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3대 보살, 릭숨 곤포Rigsum Gompo(①아발로키테스바라-관세음보살, ②바즈라파니-금강밀적보살, ③만쥬스리-문수보살)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캬파 종단의 권위를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 사캬의 역사적 배경
티벳역사에서 11세기는 불교가 부활하며 활력이 넘친 시기였다. 이때 캬규파종파와 함께 사캬파종파도 사캬사원을 세우며 티벳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사캬사원은 1071년 당시 세력 있는 콩Kong가문(8세기 트리송 테첸왕 일족의 후손)의 일원이었던 콩 최걀 포(Kong Chogyal Pho)가 세웠다. 사캬사원의 원장은 티벳의 다른 사원들이 전 원장의 환생 라마를 사원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과는 달리 세습제였으며 콩가문의 자손들에 한해서만 승계되었다.
사캬사원이 당시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사원의 역할을 인도식 불교대학들을 본따 설립한 사원 내 학교교육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사캬의 원장을 지냈으며 사캬 판디타Sskya Pandita(사캬의 대학자라는 뜻)로 알려진 쿤가 걀첸Kunga Gyaltsen이다. 그는 지각과 논리에 관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써 학문적 탁월함과 영적인 고귀함을 인정받고 만쥬스리(문수보살)의 현신으로 동일시되었다.
1251년 사캬 판디타가 죽은 뒤 그의 조카들 중 한 사람이 사캬원장이 되었고 티벳 전역은 당시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는 사캬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캬파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몽골식의 통치방법으로 후에 티벳 통치체제에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와 후원자라는 성격을 규정한 이러한 미묘한 관계는 나중에 중국이 후원자를 자칭하며 티벳을 지배하는 권리를 주장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몽골의 힘을 배경으로 한 사캬파의 주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몽골 통치자들간의 갈등과 부패 그리고 카규파와의 경쟁으로 사캬파는 1354년 몰락하였다. 이후 카규파가 권력을 장악해 티벳정부는 우지방의 네동Nedong으로 옮겨 갔지만 사캬는 중국의 지배하에 들기 전까지 여전히 자치권을 유지했다.
#태그 : 티베트, 티벳, 티베트여행, 티벳여행, 수미산, 카일라스, 불교우주론, 달라이라마, 조캉사원, 티벳족, 수미산순례